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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시사,정치,경제

광복절 역사 1분요약, 국가기념일 태극기 다는법과 주의점

by 토종한국인 노노코 2020. 8. 15.

 

 

 

광복절의 의미와 해야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봅시다 

대체공휴일로 지정된 8월 17일 월요일, 다들 어떤 것을 하며 지내실건가요 ?

대한민국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로써, 태극기 하나 달아주시는건

어떨까요 ? :)) 

 

 

 

 

 

정의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

 

그때의 우리는? 

 

국인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태평양전쟁 말기 해외에는 김구의 대한민국 임정, 김두봉의 조선독립동맹, 김일성의 빨치산 그룹,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 등 독립운동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연합국의 후원 속에 국내 진공을 계획 중이었고, 국내에서는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이 이들과의 긴밀한 연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평범한 국민들에게 광복은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었지만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1945년 8월 13일 포츠담선언의 수락과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면서 15일 일본은 패망하고 한국은 해방되었다. 광복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8월 15일의 서울은 고요했다. 히로시마에서 폭사한 의친왕의 아들 이우의 장례식이 이날 오후 평온하게 거행되었다. 서울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광복의 감격을 노래한 것은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풀려나 행진함으로써 광복을 확인시킨 16일부터였다. 

 

ⓒ공보처 홍보국, 8·15 해방 당시 서울역 앞에 모인 시민들 (왼)

16일 오후 휘문중학교에 운집한 5천여 명의 한국인들은 건준위원장 여운형의 연설을 들으며 광복을 실감했다. 경축대회를 열던 한국인들은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경성역으로 달려나갔고, 안재홍은 패전한 일본인에게 관용을 당부했다. 평양과 서북에서 신사가 불탔고 관공서 방화나 악질 친일파 공격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남한은 평온했다.
안재홍이 지방마다 건국을 준비하기 위한 건준 지부를 결성하라고 방송한 이후 전국에서 17~18일에 걸쳐 광복 축하 집회가 열렸고, 건준 지부가 조직되어 1945년 8월 말에 이르면 남한 내 145개 시, 군에 건준위 지부가 결성되었다. 건준위는 조선총독부와의 타협 속에 여운형을 위원장,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1945년 8월 15일 출범한 조직이다. 중심인물들은 조선건국동맹원들과 여운형의 인맥들이었다. 치안유지, 식량 확보 등을 위해 조선총독부는 건준위가 필요로 하는 재정적 지원과 협력을 제공했다. 건준의 임무가 치안유지 협조에 국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건준이 말 그대로 건국을 준비하는 조직이라고 생각했고 실천에 옮긴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 건준 지부들이 치안대, 보안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던 지방의 자치적 조직들로부터 재편되고 실질적 행정권을 행사하자 이에 경악한 총독부는 일본군 헌병대 등을 동원해 강제 해산을 시도했지만 이미 그 힘은 총독부 통제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결정적 시기에 기회를 얻은 한국인들은 현명하게 자주적 건국의 길로 달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경성 계동 휘문고보의 군중 속 여운형.

건준의 가장 큰 역할은 광복 후 한국인들이 정치 사회 조직을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광복 후 불과 1개월 만에 50여 개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조직될 정도였다. 하지만 건준이 당시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적 중심으로 부각되면서 좌우익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간부진 교체 과정에서 좌익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우익들의 불만은 커졌고,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대표되는 안재홍이 부위원장직을 사퇴하게 된다. 또한 이들이 9월 초에 급하게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으로 전환한 것은 그 이후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한편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지도자들이 속속 입국하기 시작한다. 남한의 경우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1945.10.16), 중국에서 활동하던 김구 등 임정 요인(1945.11~12)들이 귀국했고 북한에는 소련에서 훈련받은 김일성 등 빨치산 그룹(1945.9), 중국 공산당의 후원으로 활동했던 김두봉, 무정 등 조선독립동맹 그룹(1945.12) 등이 귀국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동안 징용, 징병, 학병, 군위안부 등으로 중국, 만주, 일본, 남태평양 등에 강제 동원됐던 한국인들이 1946년 중반까지 대거 귀환한다. 죽음을 넘어섰던 이들의 귀환, 거기에 전통적 영웅담을 통해 존경과 신망을 얻은 민족 독립운동가들의 귀환은 광복 이후 한국 정치에 힘을 불어넣었다.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출발

당시는 일제에 대한 증오심과 잔재 청산 요구, 새 시대에 대한 소망, 아직은 보이지 않지만 거대한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이 모든 것들이 그동안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앞장섰고 조국을 위해 아픔을 겪었던 많은 이들과 함께 한반도의 상황을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시대로 끌고 나가고 있었다.
8·15 광복 당시 우리 민족에게 분할 점령이나 군정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범 국가이자 패전국이었던 일본에서 실시되었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러한 정책들이 실시되지 않았다. 선거로 구성된 의회가 내각을 구성해 주권을 행사했고 군국주의 전쟁 기구들은 폐지, 전범은 추방되었으며 민주적 개혁이 실시되었다. 그 대신 일본을 위해 준비되었던 군사 점령, 군정 실시 정책은 한국에서 시행되었다. 예상보다 빨랐던 일본의 항복, 38선을 기준으로 소련과 미국이 분할해 점령하면서 시작된 우리 현대사 비극의 씨앗이었다.

 

 

내용

 

 

1949년 10월 1일 제정된「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의거, 광복절이 국경일로 제정되었다.

이 날은 경축행사를 전국적으로 거행하는데 중앙경축식은 서울에서, 지방경축행사는 각 시·도 단위별로 거행한다.

이 날의 의의를 고양하고자 전국의 모든 가정은 국기를 달아 경축하며, 정부는 이 날 저녁에 각계각층의 인사와 외교사절을 초청하여 경축연회를 베푼다.

광복회원을 위한 우대조치의 하나로,

광복회원 및 동반가족에 대하여 전국의 철도·시내버스 및 수도권전철의 무임승차와 고궁 및 공원에 무료입장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복절 [光復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광복절에 그렇다면 태극기를 어떻게 달까요 

 

국기 다는 법

  • ※ 태극기를 조기로 게양할 경우에는 함께 게양하는 다른 기도 조기로 게양
  • ※ 차량이나 보행자의 통행에 지장을 줄 우려가 있거나 깃대가 짧아 조기로 게양할 수 없는 등 부득이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조기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최대한 내려 단다.

[관련 법령]

  • 대한민국 국기법 제9조(국기의 게양 방법 등)
  •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 제13조(국기의 게양 및 강하 방법)
  • 국기의 게양·관리 및 선양에 관한 규정 제7조(국기의 조기 게양)
  • 국기 다는 위치
    • 1. 단독(공동) 주택 : 집 밖에서 보아 대문의 중앙이나 왼쪽에 게양한다.

       

       

       

    • 2. 건물 주변 : 전면 지상의 중앙 또는 왼쪽, 옥상이나 차양시설 위의 중앙, 또는 주된 출입구의 위 벽면의 중앙에 게양한다.

       

       

       

    • 3. 차량 : 전면에서 보아 왼쪽에 게양한다.
      ※ 건물 또는 차량의 구조 등으로 인하여 부득이한 경우에는 국기의 게양 위치를 조정할 수 있음

[관련 법령]

  • 대한민국 국기법 시행령 제18조(국기의 게양 위치)
  • 국기의 게양·관리 및 선양에 관한 규정 제10조(주택 및 건물에서의 국기 게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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